곡신谷神을 그리는 사나이
★이시환(시인, 문학평론가)
비가 내리는 오월, 어느 날이었다. 언제나 이런저런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인사동, 오늘도 예외는 아니지만, 어느 화랑에서 우연히 만난 그의 그림들은 수줍음을 타는 색시처럼, 아니, 웅대한 적막을 끌어안고 있는 산들의 침묵으로 다가온다. 그녀 혹은 사내들(그림)이 조심조심 다가서는 내게 먼저 말을 걸어온다. 순간, 나도 모르게 한쪽 귀를 기울여 보지만, 그들의 소리는 들리는 듯 마는 듯 바람처럼 사라져버린다. 분명한 것은 언제 어디선가 보았던, 그래서 눈에 익은, 한국의 산들이 크고 작은 화폭 안으로 들앉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화가)의 산에는 움직이는 사람이나 새 한 마리조차 없다. 아니, 벌레 한 마리도 없고, 힘차게 떨어지거나 흐르는 물길조차 없다. 물이 있다면 그저 고여 있는 조용한 호수가 어쩌다 보일 뿐이다. 오로지, 가까이 있는 산과 멀리 있는 산들의 능선과 스카이라인이 선명하면서도 그윽할 뿐이다. 그 선명함이란 단순히 명암과 색상의 변화에 따른 것이지만 그는 그것으로써 세상을 내려다보는 듯한 광활한 시계를 확보하고 있다. 그 광활한 시계 탓일까, 그의 산들은 멀리 바라보는 느긋함 같은 여유로움마저 묻어나고, 그 여유로움 속에서 피어나는 정적 고요와 안온함이 감돈다. 그렇다! 거기에는 더 근원적인 이유가 있다. 구체적으로 들어내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산과 산에는 그야말로 그윽한, 깊은 골짜기가 있다. 골짜기, 바로 그것이다.
분명, 그가 그리고자 한 것은, 보기 드문 기암괴석과 폭포와 신선처럼 유유자적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우러진 산의 외양이 아니다. 그저 가까이에서 보면 온갖 초목들이 저마다 다른 생김새와 다른 빛깔로써 살아가는 몸짓인 열연으로 가득하지만, 멀리서 보면 커다랗고 깊은 숲이 되어 또 다른 한 세상을 이루고 있는, 그런 산이다. 그것은 분명 보이지는 않지만 기운으로 가득 찬 세계이며, 고요하지만 온갖 것들이 생사를 거듭하는 장엄한 세계이기도 하다. 바로 그런 세상, 그런 세계 한 가운데에 있는 것이 다름 아닌 깊고도 그윽한 골짜기이며, 그것들을 거느리는 외로운 산봉우리인 것이다.
겉으로 드러내고 싶어도 드러낼 수 없고, 말로 설명하고 싶어도 설명되지 않는 침묵의 깊은 골짜기에서는 온갖 생명들이 피어나고, 그것들이 무성해지고, 때에 따라서는 시들어 죽어가는, 그러나 아득한 그리움처럼 다시금 되살아나는 세상의 자궁인 것이다.
그 깊고 오묘한 구석을 그려내기 위해서 산만을 바라보고, 산만을 화폭에 담고, 산만을 묵상해온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소원섭이란 사나이가 아닐까 싶다. 말없이 골짜기를 거느리고 있는 저 산봉우리와 그 산등성이에 박힌 돌들이 말해주는 듯하다. 그것은 분명, 여자에 기대어 사는, 세상 만물 가운데 하나인 사내에 지나지 않지만, 이 깊은 계곡과 깊은 숲이 가두어 놓는 적막의 의미를 일깨워 주는 듯하다.
작가노트 | 자연, 그 오고 감 | 하늘의 기운을 천기라 하고 자연의 변화적 시차를 오행이라고 한다. 지구에서 생존하는 모든 생물은 오운과 육기에 따라 변화한다. 오행은 다섯 가지 기운, 혹은 움직임으로 목, 화, 토, 금, 수라고 하고 오행과 함께 변화하는 여섯 가지 기운을 육기 또는 지기라 한다. 음과 양의 원리는 성하고 쇠하는 것을 근본으로 돌고 도는 것으로 생명의 시초는 음과 양의 기운이 교류하며 식물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동물과 사람은 잉태와 분만을 하는 것이다.
5행은 계절적으로 봄(목), 여름(화), 토(중), 가을(금), 겨울(수)로 나누고 6기는 풍 한 서 습 조 화를 말한다. 풍(風)은 땅 아래 깊은 곳에서부터 생기가 발동하여 생명의 문이 열리려 하고 한(寒)은 위로는 음이 아래로는 양이 놓이는 현상인 수승화강으로 이루어진다. 서(暑)는 음과 양의 기운이 오고 가면 생장이 활발해 지는 것이며 습(濕)은 습윤은 생장의 근본으로 음양이 서로 주고받고 섞이면서 축축한 물기가 생긴다. 조(燥)는 형체가 견실해지고 고정된 모습으로 완성되고 계절로 하면 가을이다. 화(火)는 물 기운이 부족하여 생장을 멈추고 잎이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자연의 모든 생물의 생성 과정은 이러한 여섯 가지 기운의 시작과 끝을 가진다. 이것이 순차적으로 나타난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자연현상의 진행되는 경로이기도 하다. 작가는 사계절 속에서 풀과 나무, 숲과 산, 바람과 강등 자연을 화면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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