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조국인 한국에서는 낯선 이름이지만 중국의 2백만 조선족 동포들에게는 추앙을 받고 있는 작곡가 정율성은 조선인이면서도 중국에서의 항일투쟁과 탁월한 음악적 업적으로 최고의 중국음악인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파란만장한 중국현대사 속에서 일생을 보낸 정율성은 1914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정율성은 광주 숭일소학교를 마치고 전주 신흥중학교에 입학했으나 부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1933년 봄 셋째 형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다.1934년 남경조선혁명군사 정치간부학교를 졸업하고 의열단에 가담하여 항일운동을 하는 한편 매주 일요일 상해로가 러시아의 저명음악가 크리노와 교수로부터 4년 동안 성악을 배웠다. 이 때 그는"아름다운 선율로 인민의 목소리를 반영하겠다."는 각오와 함께 '부은'이라는 이름을 '율성'이라고 바꿨다. 그는 중?일 전쟁이 터지자 중국항일투쟁의 근거지인 연안으로 향한다. 연안의 '노신예술학교'에 입학한 정율성은 모택동이 참석한 대규모 집회에서 <연안을 노래하다>라는 곡을 불러 청중들의 심금을 울렸다."아, 예안! 너 장엄하고 웅대한 고도여! / 뜨거운 네 가슴에 용솟음쳐라 / 천만 청년의 심장이여 / 적을 향한 증오를 묻어두고서 / 산과 들에 길게 길게 늘어서거라"웅장하면서 서정적인 이 노래는 중국전역에 퍼져 오늘까지도 우리의 <아리랑>처럼 널리 애창되는 <연안송>이다. 중국 공산당 정권이 존망의 위기에 처해있을 때, 수많은 젊은이들은 <연안송>을 부르며, 혁명의 성지 연안으로 몰려왔다고 한다. 정율성은 이어 <팔로군행진곡>을 창작한다. 중국인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이 노래는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에서 개막식 첫 프로그램으로 연주되기도 했다."앞으로, 앞으로, 앞으로!/우리의 군대는 태양을 향한다/조국의 대지를 밟고서/민족의 희망을 짊어지고서/우리는 아무도 당할 수 없는 역량"모든 예술 활동이 금지되었던 문화혁명도 정율성의 불타는 창작열을 꺾지 못했다. 그는 문화혁명 기간 모택동의 20편의 시에 곡을 붙이는 작업을 완성했다.정율성은 당시 사인방이 등소평을 비판하는 노래를 지으라고 명령하자 "사인방을 위해서는 음표 하나도 적지 않겠다" 라며 단호히 거절했다고 한다. 1976년 그와 친분이 두터웠던 주은래에 이어 모택동이 세상을 떠나자 문화대혁명이 종결되었다. 그는 주은래의 생애를 노래하는 모음곡을 준비하고 1976년 12월 7일, 고혈압으로 쓰러져 삶을 마감하였다. 지금 그는 북경의 열사공묘에 말없이 누워있다. 이데올로기 문제로 오랫동안 묻혀있던 정율성은 21세기 들어서야 '중국의 혁명음악가'에서 광주가 낳은 위대한 음악가로 복권되었다. 이제 정율성은 광주의 얼굴이자 냉전시대의 망령을 극복할 문화적 코드라는 평가 속에서 그의 업적을 기리는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2005년 광주에서 시작된 정율성 국제음악제는 아시아의 대표적인 음악축제로 성장하고 있다. 오래된 우물 곁에 석류나무가 있던 고향집을 평생 그리워했으면서도 이국에 묻혀야 했던 정율성, 음악을 혁명과 전투의 무기로 삼았던 정율성을 통해 광주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출처 : 광주관광이야기>
주소 : 광주 북구 운암동 328-16
| 전화번호 : 062-670-7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