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감으로 자아낸 색선(色線)의 향연"
실을 직조하여 옷감을 만들어 온 역사는 길다. 그 오래된 역사는 대부분 여성의 역할로 이어져 왔다. 일의 성격상 아이를 양육하는 것과 병행하기에 가장 쉬웠기 때문일 것이다.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가 실의 역사에 주목하여 쓴 『총보다 강한 실』에 따르면 산업혁명 이전까지 수백만 명의 여성들이 뽕잎을 따서 누에를 먹이고 손으로 직접 실을 뽑고 베틀 앞에 앉아 손톱이 빠지도록 옷감을 짰다. 방직공장이 생기자 먼지와 소음에 시달리며 주 60시간씩 일을 했다. 실의 역사는 여성의 생활사이자 노동사다. 세로로 길게 늘어뜨린 날실과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씨실을 서로 교차시키며 고단하고 지루하게 엮어간 직물 속에는 여성들의 삶의 애환이 녹아있다. 강혜은 작가는 유화물감으로 마치 씨실과 날실이 교차하며 하나의 직물을 만들어가듯 캔버스 위에 수많은 색 선(色線)을 쌓아나간다. 수백 년의 역사 속 여성들이 그러했듯 강혜은 작가는 물감에서 무수한 실을 자아내며 여자로서, 또한 작가로서 캔버스 위에 삶의 애환을 풀어낸다.
강혜은 작가의 작품을 처음 마주한 이들은 공통적으로 먼저 재료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언뜻 봐서는 실인지 물감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실처럼 가늘고 긴 색 선들이 층층이 쌓이고 겹쳐져 화면을 가득 채운다. 각기 다른 색의 선들이 중첩되면서 어우러져 시각적으로 폭신하고 보송보송한 촉감이 느껴지는 듯하다. 작가는 10년간의 시행착오 끝에 물감에서 실을 뽑아내는 기법을 완성하였다. 마치 누에가 실을 뽑아 고치를 만들어가듯, 유화물감을 손아귀 힘만으로 적정한 압력을 가하여 굵고 가는 색 선을 뽑아낸다. 팔레트에서 조합한 색상을 붓으로 펴 바르는 것이 아니라 물감 덩어리를 손가락의 힘으로 짜내어 선들을 쌓아가며 전체적인 형태와 색감을 조화시킨다. 실처럼 보이는 유화물감의 선들이 겹겹이 겹쳐지면서 층을 만들고 그 사이에 작은 공간을 형성한다. 평면의 캔버스이지만 전체적으로 입체감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유화물감의 색 선들이 층을 쌓으며 만들어낸 공간 때문이다.
작가가 이러한 기법에 착안한 것은 앞서 언급했던 실의 역사 속 산증인과도 같은 어머니의 영향이 크다. 1956년생 강혜은 작가는 유년시절을 부산에서 보냈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부산 서면에서 큰 의상실을 운영하셨다. 의상실 내부에는 옷을 제작할 수 있는 작업실과 작은 공장이 함께 있었고, 어머니가 일을 하실 때면 작가는 그 옆에서 실과 천을 가지고 놀곤 했다. 작가에게 실과 천은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소재이다. 일흔의 나이를 바라보는 작가는 지금도 실과 천을 만지면 어린시절로 돌아가 어머니의 품 속에 있는 것 같은 편안함을 느낀다고 한다. 서울여자대학교에서 그림을 전공 한 후, 90년대에 들어서부터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한 작가는 결혼 후, 환경운동을 한 남편을 따라 해발 500m 산 속으로 들어가 아이들을 키우며 생활을 했다. 수백 년의 세월동안 여성들이 옷감을 짜는 일과 아이를 키우는 일을 병행하며 삶을 이어왔듯이, 작가는 인가가 드문 산 속에서 살림과 양육을 도맡아하며 작업을 지속했다. 2014년 양산으로 작업실을 옮기기까지 20년의 세월을 무림 산중에서 자연의 일부로 살았다. 얼핏 들으면 자연 속에서 보낸 20년의 시간이 '물아일체(物我一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작가는 작업의 끈이라도 잡고있지 않았다면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버티기 어려운 처절한 삶의 연속이었다고 말한다. 손아귀의 힘만으로 강약을 조절하며 물감을 짜내는 탓에 작가의 손은 마디마디가 휘어져있고, 관절이며 눈이며 어느 곳 하나 성한 곳이 없다. 하지만 작업에 몰두하는 그 시간만큼은 등에 진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았을 것이다.
초창기 작품은 실과 천, 물감을 이용한 콜라주(collage)작업이나 스크래치(scratch), 테이핑(taping), 드리핑(dripping) 등 끊임없는 선(線)작업이 중심이었다. 하늘의 뜻을 알게된다는 지천명(地天命)의 나이에 그녀는 유화물감에서 실을 뽑아내는 듯한 기법을 처음 시도한다. 이때의 작업은 당시 작가가 일상에서 늘 마주하는 자연의 모습을 구상적인 형태로 표현한 것들이다. 20년 간 자연 속에 묻혀 자연의 일부로 생활해 온 작가의 일상이 테마가 되어 캔버스를 구성한다. 몇 년간 지속된 작가만의 독창적인 시도는 어느새 섬세하고 화려한 동양자수를 연상시킬만큼 명주실처럼 가늘게 물감을 쌓아올리는 경지에 이른다.
실인지 물감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섬세하고 가늘게 물감을 자아내는데 몰입해왔던 작가는 어느덧 색 선의 두께를 자유자재로 조절하는데 익숙해지자 이번에는 반대로 유화물감의 물성(物性)을 드러내는 방법을 시도한다. 이전의 작업들은 최대한 가는 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온 세밀한 과정이었다면, 색 선을 쌓아가는 중간중간 유화물감 덩어리를 던져 터트리고, 굵고 가는 실이 뒤섞여 교차하는 방식의 과감함을 보여준다. 2014년 산에서 내려와 도심으로 작업실을 옮기면서 '자연'의 풍경에 국한되어 있던 작업의 테마도 다양해지는데, 도시에서 나고 자란 유년시절의 기억을 재구성한 '도시' 풍경, 모네(Claude Monet)의 작품 <수련>의 배경이 된 지베르니(Giverny) 여행 후 그에 대한 오마쥬로 제작된 '수련' 시리즈 등이 있다.
물감을 건조 시키는 데 시간이 필요한 유화의 특성상 작가는 캔버스를 이젤에 세워 작업할 수 없다. 작가는 캔버스를 바닥에 눕힌 채 허리를 숙여 물감을 손으로 흩뿌리듯 작업한다. 작가는 이러한 작업과정 자체가 일종의 수련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고행에 더 가깝다. 호흡을 조절하고, 손끝에 온 신경을 집중하여 작업하면 어느새 마음도 숙연해진다. 물감 덩어리를 손에 꼭 쥐고 색 선을 잣다 보면 어린 시절 행복했던 기억과 그 시절을 향한 그리움이 응축되어 캔버스 위에 쌓인다. 옛 여인들이 손으로 직접 실을 뽑고 베틀 앞에 앉아 옷감을 짜듯, 강혜은 작가는 캔버스 위로 허리를 굽혀 끊임없이 고단하고 지루하게 선을 쌓아 작품을 완성한다.
최근에는 앞서 언급했듯, 구상의 형태를 무너뜨리며 색(色)과 형(形)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운 작업을 시도한다. 이전의 작업이 작품의 완성도에 집중하는 과정이었다면, 현재의 작업은 ‘작업을 하는 행위' 그 자체에 집중하여 좀 더 생동감 넘치고 에너지가 느껴지는 작업을 한다. 이번 맥화랑 개인전에서 선보이는 20여 점의 작업은 지난 겨우내 작업실에서 꼼짝 않고 작업에만 전념한 결과물이다. 어떠한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에 집중했던 것이 지난 세월의 결과물이라면, 이번 개인전에서는 그렇게 만들어냈던 색(色)과 형(形)으로부터 다시 자유로워진다. 어른답게 나이가 든다는 것, 멋있게 늙는다는 것은 무언가에 사로잡혀있던 ’고집‘과 ’아집‘을 스스로 내려놓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아닐까. 이번 전시를 통해 강혜은 작가가 실처럼 겹겹이 쌓아 올린 색과 형의 결 속에서, 이전의 틀을 벗어나 한층 더 자유로워진 풍경을 마주하며 ‘자유로움’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 맥화랑 큐레이터 김정원
위치 URL : http://www.gallerymac.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