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그림은 ‘살아가는 방식’과 ‘존재의 방식’을 일치시키는 구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단 한 번의 결정적 행위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남김과 지움이 반복되는 시간적 겹침의 과정을 거친다. 즉 화면을 채우기보다 덮어버리고, 밝히기보다 감추는 길을 선택하며, 그 결과 본래 이미지가 사라지고 난 이후에야 드러나는 또 다른 의미를 마주하는 것이다. 이 역설적인 그리기 방식을 작가는 ‘지워가기’라 이름 붙였고, 그 태도는 화면 위에서의삭제 행위이자 동시에 기록 행위이며, 부정이자 긍정이 되곤 하였다. 결국 그리려는 대상은 어떤 물체의 실체가 아니라 그 실체가 나라는 구조체로부터 반영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변형의 리듬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이것은 선(線)으로 그릴 수 있는 것도, 형(形)으로 파악되는 것도, 의미로 단정되는 것도 아닌 끊임없이 흔들리는 실재와 인식의 사이에 존재하는 미세한 파형과 같았다. 결국 작가의 그림은 일종의 흔들림인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는 본래의 형상이 지닌 신뢰가 아니라, 왜곡된 형상이 감춘, 현상 너머의 진실을 찾고 있다고 할 것이다. 즉 세계가 작가에게 강요한 ‘정형화된 모습’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관계할 때 발생하는 주관적인 흔들림이 주는 흔적을 응시해 기록한 것이었다. 실재의 반영이지만 실재가 아니며, 실재보다 더 실재를 암시하는 사이의 형상. 그렇게 작가는 실재를 보는 것이 아닌 본인의 흔들림만을 본 것이다. 어찌 보면 작가 그림의 잠재성(Potential)은 이미 머물고 있던 것이다. 들뢰즈의 말을 빌리면 잠재적인 것은 현실적이지 않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현실을 지닌다. 그러니 잠재성은 아직 현실화되진 않았지만 이미 존재하는 힘으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잠재적인 것은 실재와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화된 것(the actual)’과 반대된다고 할 수 있다. 잠재적인 것은 잠재적인 한에서 완전히 실재적이라는 의미로 보면, 흔들림은 현상이지만 그 흔들림을 반영하고 있는 ‘작가’의 구조 자체가 흔들림이란 잠재성을 품은 실재라고 이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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